11월 1일은 많은 천재들이 별이 된 날입니다. 오늘은 11월 1일 세상을 떠난 천재 싱어송라이터 유재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재하, 천재의 유년시절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북 안동군 하회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성룡의 14대손인 집안이 탄탄한 사업가 집안으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안동에서 태어난 후 서울에서 성장하며 은석국민학교, 삼선중학교,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양대학교 81학번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전공은 순수음악이었다고 합니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일화로 유재하가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오면 어떻게 하냐"하고 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유재하의 음악이 모차르트의 음악만큼 훌륭했다는 뜻이겠지요.
유재하는 클래식 음악 전공이었지만 대중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유재하는 작곡과 작사, 그리고 편곡 이외에도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도 능통했으며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고 합니다.
유재하의 음악활동의 시작점
유재하는 한양대 재학 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로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유재하는 밴드에서 활동하며 조용필에게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줬고 조용필의 7집 앨범에 수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재하는 조용필의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받지 못하며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하게 됩니다.
유재하는 위대한탄생 활동 중 조용필이 곡을 써보라는 조언에 10곡 이상을 작곡하였으나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설이 많으며 유재하는 조용필에게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 두 곡을 주었으나 조용필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듣고 본인이 생각한 곡의 정서와 맞지 않아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재하는 한양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했습니다. 유재하는 김현식을 위해 자신이 쓴 자작곡을 모두 가져갔지만 멤버별로 한 곡씩만 사용하겠다는 조건으로 한 곡만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유재하가 이 때 김현식을 위해 준 곡이 희대의 명곡인 가리워진 길 입니다. 김현식은 유재하에게 본인의 3집 앨범을 줄 떄에도 사랑하는 동생 배신자 친구 재하에게라고 농담으로 써서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재하의 솔로 활동, 전설이 된 한 장의 앨범
유재하는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전설이 된 한 장의 앨범을 내게 됩니다. 유재하는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싶어서 돈 800만원을 들여 자신이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한 솔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내게 됩니다. 유재하는 대부분의 악기를 자신이 연주했으며 오케스트라 또한 유재하가 대학교를 다니며 알게 된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섭외해서 녹음했다고 합니다.
사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처음 나왔을 때는 평론가들이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고 그저 특이한 앨범 정도로만 치부했습니다. 또한 라디오나 TV 출연 전 PD에게 사전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때마다 유재하는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히 통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재하의 노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를 통해 인기를 얻기 싲가합니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에서 유재하의 지난날이 장기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편 당시에는 팝이나 클래식을 고상한 문화예술로 치지만 대중가요는 대중 오락의 한 종류로 치부하는 분위기였고, 유재하가 클래식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 가요를 만드는건 일명 딴따라가 되기로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11월 1일, 별이 되어버린 천재
유재하는 1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 약 2개월이 지난 무렵 동창회를 나간다고 나간 후 다음 날인 11월 1일 새벽에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남대로 근처 강변북로에서 중앙성을 침범하며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유재하의 사망 이후 유재하가 유명한 가수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문세는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울면서 뉴스를 전했다고 합니다. 유재하와 이문세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유재하가 이문세에게 생전 두 곡을 써주었는데 이문세 1집의 그대 내 품에와 이문세 3집의 그대와 영원히입니다. 유재하의 사망 이후에는 라디오에서 사랑하기 때문에와 지난날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생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유재하였지만 사후 오히려 인지도가 올라가며 뒤늦게 인기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재하의 평가
유재하는 한국형 발라드의 문을 연 선구자 중 하나라고 평가받습니다. 유재하는 발라드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당시 단조(마이너 코드) 위주이던 발라드 음악에 장조(메이저 코드)를 접목하는 시도를 통해 그것을 유행시켰습니다. 또한 기존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브릿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는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유재하는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만큼 세련된 오케스트라 선율이 들어가는 등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줬습니다. 일명 뽕끼가 사라졌으며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신파조는 아닙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평을 듣습니다.
유재하의 음악은 그 이후의 후배 가수들, 특히 90년대의 발라드 가수나 작사, 작곡가 등 종사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승훈은 유재하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11월 1일을 자신의 데뷔일로 삼았으며 김광진은 자신의 앨범에서 유재하의 헌정곡을 발표하고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는 100년은 퇴보했다고 평하는 등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후에도 유재하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 및 헌정 앨범이 발매되었습니다. 또한 유재하의 사후 유족들은 1집인 사랑하기 때문에의 수익금을 이용해 유재하 음악 장학회를 세우고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경연대회에서 조규찬, 유희열, 방시혁, 김연우, 정준일 등의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글을 마치며
저는 유재하라는 인물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요절해버린 천재이기도 하지만 단 한장의 앨범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니 말이죠. 오늘 11월 1일만큼은 유재하의 유작이자 데뷔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의 글 마치겠습니다. 클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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